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알레산드로 모레스키 (문단 편집) == 생애 == 유아기 때 [[서혜부]] [[탈장]]을 치료하면서 [[거세]]를 같이 하게 되었다고 한다. 의료 기술이 발달한 지금은 정밀하게 탈장만 치료하는 것쯤은 식은 죽 먹기지만, 당시에는 [[고환]]을 보존하면서 탈장부위를 처치할 만큼 기술이 정밀하지 못했기에 유아에게 서혜부 탈장이 오면 거세를 감수하고 탈장을 고치는 식으로 수술할 수 밖에 없었다. [[1898년]] [[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당]] [[성가대]]의 [[소프라노]]로 채용되었고, [[1883년]]에는 [[시스티나 경당]] [[성가대]]에도 소속되었다. 두 성당을 겸업으로 활동하였으며, 양쪽 성당 모두 소프라노 독창을 담당하였다. [[1898년]]에는 [[시스티나 경당]] [[성가대]]의 [[교육]]도 같이 담당하였다. [[1913년]] [[바티칸]]의 그 유명한 [[성 베드로 대성당]]의 [[성가대]]에 초청받았으며, 그동안 해오던 성가대를 그만두고 [[성 베드로 대성당]]의 성가대로 활동하다가, 그 다음해인 [[1914년]] 급작스러운 건강 악화로 은퇴하게 된다. 결국 [[1922년]] [[폐렴]]이 악화되어 자신이 살던 [[로마]]에서 사망하게 된다. 무대에 한번 서보지도 못하고 죽어간 [[카스트라토]]가 넘쳤고 모레스키 본인은 카스트라토라는 직업이 사실상 사라진 후에[* 모레스키가 유아였던 [[1861년]]에 [[이탈리아 왕국]] 헌법에 음악적 목적의 인위적 거세를 금지했으며, [[1902년]]에는 로마 [[교황청]]에서 카스트라토 양성을 공식적으로 금지했다.] 카스트라토로 활동했다는 것을 상기하면 카스트라토로서는 매우 성공한 인물이다. 또한 카스트라토 뿐만 아니라 모든 성악가에게 가장 영예로운 자리인 [[성 베드로 대성당]] [[성가대]]까지 올라간 것을 보면 평범한 [[성악가]]들도 뛰어넘을 정도로 잘 나갔던 인물이다. 당대의 명성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라고 보면 된다. 사실 모레스키와 동시대에 카스트라토로 활약했던 사람이 모레스키 말고도 몇 명 더 있었고, 이들도 모레스키 못지않게 성공했지만 이 사람이 마지막 카스트라토로 기록된 이유는 이들 중 마지막으로 세상을 떠났고, 유일하게 목소리를 남긴 것으로 공인된 카스트라토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. 사실 엄밀히 말하면 목소리를 남긴 카스트라토는 모레스키만 있는 것은 아닌데, [[https://www.youtube.com/watch?v=vjBTwwqLM5w|La cruda mia nemica]]라는 노래에 모레스키와 동시대에 활동했으며, 모레스키의 친구이기도 했던 도메니코 살바토리의 목소리가 남아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.[* 참고로 모레스키도 이 합창곡을 같이 불렀는데, 살바토리가 알토, 모레스키가 소프라노를 맡았다.] 다만 이 곡은 합창곡이라 목소리가 뒤섞여 있어서 독창으로 유일하게 목소리를 남겼다는 타이틀은 모레스키가 계속 유지할 듯 보인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